[기사입력일 : 2017-09-11 10:55]

그 시절 ‘사람 공간’




‘그 학생은 매일 왔다. 매일 저녁 아홉시쯤 되면 와서는 꼭 한구석에 마치 자기가 정해 논자리라는 듯이 그 자리에 가 앉아서 홍차 한 잔 마시고는 두 시간 가량 앉았다가 가는 것이었다. 그는 와 앉아서는 정해 놓고 영숙이를 바라다보는 것이었다. 세상에 다른 아무 존재도 없이, 오직 영숙이만 있다는 듯이 그 두 눈은 영숙이를 바라다보는 것이었다. 애정과 욕망과 정열에 가득 찬 눈이었다. 그런데 영숙이는 첫날부터 이 시선이 반가운 것을 감각한 것이었다. (중략) 어떤 날 밤에는 한 번 그 학생이 들어오는 것을 보자 영숙이는 자진하여서 ‘미완성 교향악’을 축음기에 걸어 놓았다. 역시 그 구석에 혼자 앉았던 그 학생은 이 낯익은 음악이 들려오자 잠시 빙그레 웃었다’ 주요섭의 단편 소설 ‘아네모네의 마담’ 중 한 대목이다. 이 작품은 ‘아네모네’라는 다방의 마담 영숙이가 그 다방을 자주 찾아오는 어느 대학생이 우수에 찬 시선을 카운터 쪽으로 던지는 것을 자기에게 주는 연모의 시선으로 잘못 인식하는 데서 빚어진 좌절과 슬픔, 희·비극적인 절망을 다룬 멋진 작품이지만 한 편으로는 그 당시 (아마 1930년대 후반쯤이 아닌가 한다) 다방 풍속을 알아볼 수 있는 재미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일제 강점과 함께 우리나라에는 새로운 문물이 많이 들어오게 됐고, 다방도 그 중의 하나였다. 초창기 우리나라 다방은 주로 개화의 문물을 맛 본 지식인들이 많이 이용했다. 때문에 단순히 차를 파는 곳이 아닌, 낭만과 풍류가 있는 사교장으로서의 구실을 했다. 다방에 모여 토론도 하고 작품을 쓰기도 했으며, 전화가 흔치 않았던 시절 연락 사무소로도 이용했다. 그 시대 다방은 단순히 차를 마시는 공간만이 아닌 지식인들의 사교장이요, 생활공간이었다. 화가 이인성이 운영하던 ‘아루스다방’, 음악 애호가 이삼근이 맡아 운영하던 ‘백조다방’, 유명한 무용가가 운영했다던 ‘낙타다방’을 비롯해 이상의 ‘제비다방’ ‘미도’ ‘녹향’ ‘상록수’ 등은 그 시대 지식인들의 숨 가쁜 고뇌를 함께 견뎌온 친구이자 피난처였다. 이상, 강계순, 박인환, 조병화, 이중섭, 이효석을 비롯해 ‘쎄시봉’의 조영남,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등도 다방이 주는 낭만과 함께 성장해온 굵직한 예술인들이다. 어디 예술인들뿐이었으랴? 안중근 의사의 거사계획도 다방을 통해 논의됐으며, 신군부에 대항했던 ‘학림사건’도 다방을 통해 시작됐다. 이처럼 다방은 민주지사들의 모임장소이자, 예술인들의 아지트였으며, 사랑방이요, 문화센터의 역할을 담당해 왔다. 요즘은 세태의 변화에 따라 다방도 많이 변했다. ‘다방’이라는 이름 자체도 사라진지 오래고 ‘카페’나 ‘커피숍’같은 서양식 간판이 주를 이룬다. 물론, 이용하는 고객들도 천차만별이다. 예전처럼 다방에 앉아 시를 논하고 담배 종이에 그림을 그리거나 성냥 개피를 쌓으며 시절을 논하고, 예술을 논하고, 미래를 고민하는 모습들은 찾아보기 어렵다. 크고 빠른 음악소리, 커피 향을 음미할 틈도 없이 바쁘게 움직이는 종업원들의 손놀림, 시끌벅적한 손님들의 웅성임…. 낭만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그러나 단 하나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현대인들 역시 커피 한 잔의 여유와 평화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도시는 물론, 주택가 골목까지 카페와 커피숍이 늘어서 있다. 이름조차 기억할 수 없는 갖가지 맛과 향의 차들이 생겨나고 현란한 인테리어로 치장해 놓았지만, ‘여유’와 ‘낭만’ ‘우리만의 문화’는 찾아 볼 수 없다. 티브이를 켜면 연일 계속되는 갖가지 사고와 엽기적인 사건들, 정국의 불안정에 관한 기사가 쉴 틈 없이 흘러나온다. 이 가을…차 한 잔의 여유로 우리의 미래를 이야기할 수 있는 푸근하고 정겨운 예전, 그 시절 ‘사람공간’…‘다방문화’가 사무치게 그립다. 이보용 기자 byleec@hanmail.net



[기사입력일 : 2017-09-11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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